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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는 우리나라 분들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이다. 빈센트 반 고흐의 치열한 미술의 세계를 소개하고 그의 생애를 알아갈 때 그의 작품이 더욱 빛나게 된다. 영혼의 화가 "나는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슬픔은 작은 시작이다".

 

빈센트 반 고흐의 생애 및 작품 설명

 

빈센트 반 고흐 생애

빈센트 반 고흐는 1853년~1890년 네덜란드 남부의 그루트 준데르 트라는 작은 마을에서 그의 인생은 시작된다. 그의 할아버지는 신학을 공부했고 아버지는 목사인 정통적인 기독교 집안의 분위기에서 자랐다 그의 삼촌 3명은 화상으로 그의 집안은 주로 성직과 미술 계통에 종사를 하였고 고흐도 1869년 삼촌의 소개로 헤이그의 화상에서 판화를 복제해 파는 일을 했었다 그때에는 그도 돈을 제법 벌어었다. 그는 그 후에 암스테르담에서 신학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879년에는 벨기에서 석탄 광산 마을에서 선교사로 봉사하기도 했다. 그가 활동했던 당시에 그렸던 초기작품 감자 먹는 사람들은 가난에 찌든 오두막과 가스등이  실내를 비추고 있고 그림의 사람들의 고된 삶이 그대로 보인다 가족들은 고된 삶을 일그러진 감자를 먹는 걸로 표현되고 있다. 고흐는 목회자의 길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 당시 회화와 종교가 같은 선상에 있다고 생각을 했다. 또한 고흐는 1886년 파리로 와서 몽마르트르에서 화상으로 일하던 남동세 테오의 아파트에서 지내기도 했다. 그대 모네, 시슬, 드가 등과도 만남을 가졌다. 당시에 인상주의 화가들의 대부격이던 화가 피사로는 그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이 남자는 미치게 되거나, 아니면 시대를 앞설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1888년 2월 그는 파리의 생활을 정리하고 따뜻하고 햇빛이 좋은 프랑스 남부의 아를로 삶의 터전을 바꾼다. 그는 아를에서 노란 집에서 고갱을 초대에 2개월 정도 함께 지내게 된다. 그러나 둘은 결국 다투다가 고흐는 흥분한 나머지 자기 귀를 자르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아마도 고흐는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서툴렀다. 그는 내성적이고 외골수였기에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20세에는 헤이그의 화상 주인의 딸 1881년에는 7세 연상의 과부인 사촌 1882년에는 아이 둘을 가진 창녀 시엔, 1884년에는 10살이나 많은 이웃여자에게 청혼했으나 모두 이러 우 지지 않아다. 그는 1889년 5월에는 생레미의 정신병원에 들어가 치료를 하고 이듬해인 1890년 5월에는 파리 근교의 오베르에 사는 닥터 가세의 곁으로 이사하게 된다 그리고 그해 7월에 그는 밀밭 근처를 성성이다가 권총으로 자신의 가슴을 쏘고 며칠 후 3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고흐는 파리의 미술계에서 인기 있던 것과는 다르게 너무나 먼 그림을 그린 화가였다. 동생 테오의 도움으로 연명한 불우한 천재였으면 생전에는 그림을 딱 한 점밖에 팔리지 못했다.

 

빈센트 반 고흐 작품 설명

탕기 영감의 초상

탕기 영감의 초상은 그가 캔버스에 유채화로 1887년에 그린 작품이다.  작품의 크기는 92*75cm이며 지금은 로댕 미술관 프랑스 파리에 소장 중이다. 이 작품은 모자를 쓴 머리 희끗희끗한 탕기 영감이 두 손을 모으고 의자에 앉아 있다. 그는 몽마르트르의 클로젤 거리에서 물감등을 파는 화방주인이다. 몽마르트르의 화가들은 친절한 그를 페르 탕기 탕기 아저씨라 불렀다. 이 그림은 고흐가 아를로 떠나기 전에 물감 값 대신에 그려준 작품이었다. 탕기 영감의 뒤에는 고흐가 수집한 일본 파호아 우키요에게 걸려있고 강렬한 원색이 화면 가득 펼쳐지고 원금감을 느낄 수 없는 평면적인 그림이다. 이 시대는 카메라의 등장으로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고흐는 단순하면서도 대담한 원색의 선으로 그리을 가득 채우고 뒤에 있는 화려한 원색인 일본 판화 우키요 때문에 자칫 탕기 영감이 붙여 보일 수 있는데 고흐는 파란 윗옷을 대담선 선으로 터치함으로써 인물에게 주목도를 가져다주는 기법을 사용하였다.

별이 빛나는 밤

별이 빛나는 밤은 1889년 작품으로 캔버스에 유채화로 크기는 73.7*92.1cm 뉴욕 현대미술관 소장이다. 볓이 빛나는 밤에 하늘에 노란 초승달이 빛나고 주변의 별들도 소영돌이 치며 꿈틀거립니다. 그림의 맨 앞에 커다란 사이프러스 나무는 마치 불꽃이 일렁이듯이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오르는 듯 보입니다. 소용돌이치는 하늘 아래에는 산과 마을 교회의 첨탑이 보입니다. 밤하늘, 노란 소승달, 별, 거대한 사이프러스가 모두 함께 휘몰아쳐 요동치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어두운 색이 주로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노랑 흰색 등으로 그림의 분위기는 밝고 환상적입니다 별이 빛나는 밤의 하늘과 별과 사이프러스 나무가 마을을 덮고 있는 따뜻한 느낌의 그림으로 생생한 붓 터치와 강력한 색감에 매료당합니다. 그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보면 "별들은 알 수 없는 매혹으로 빛난다. 하지만 저 밝은 빛 속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 나를 꿈꾸게 하는 것은 저 별빛이었을까?... 캔버스에서 별빛의 소리가 들려 나의 영혼도 저 색들처럼 하늘로 번져 갈 수 있을까? 트와일라이트 블루 빛깔의 대기를 뚫고 별 하나가 또 나오고 있어" 1888년 6월에 보낸 편지입니다. 

고흐의 볓이 빛나는 밤과 모네의 양산을 쓴 여인을 비교해 보면 모네의 그림은 한눈에 양산을 쓴 여인의 모습을 알아보지만 고흐의 그림은 모호 간 데가 있습니다. 사실 그림의 왼쪽에 솟아로는 듯한 것이 나무라는 걸 그 발 알 수 있지만 그러나 마치 불꽃이 솟아오르는 느낌으로 하늘과 별과 나무가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고흐의 마음속 하늘과 별과 달과 나무입니다 이 그림은 고흐가 고갱과 싸우고 자신의 귀를 자르고 난 뒤 생레미의 정신병원의 창문 팍에서 보이는 보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고독과 절망 혼란 스러의 그의 내면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창문의 창살 너머의 그가 보는 자연은 너무나 눈부십니다.

아를의 반 고흐 방과 해바라기

아를의 반 고흐의 방은 그가 프랑스 남부 아를의 노란집에 살 때 그린 그림입니다. 그이 그림에는 해바라기가 자주 등장합니다. 그림에서는 방에 침대와 의자 2개가 보이고 문과 창문, 탁자도 보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왼쪽 벽과 오른쪽 벽이 길이가 다르고 벽이 비스듬합니다. 방바닥도 위로 올라가 있고 침대의 모양도 균형이 맞지 않습니다. 의자 2개도 지나치게 뒤쪽에 있습니다. 창문도 각도가 이상합니다. 방이나 가구 창문이 우리가 실제 보는 모양과는 사뭇 다릅니다. 그냥 자신의 방을 느낌 그대로 그린 것입니다. 고흐는 파리에서의 삶에 알코올에 지친 상태로 1888년 프랑스 남부의 아를로 왔습니다. 그리고 우키요에나 자포니즘에 심취했던 그가 아를이 이상향이던 일본과 닮은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를의 따뜻한 햇빛과 밝은 색이 지진 고흐에게 생기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 5월에 집을 빌려 고갱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침대와 의자들을 사고 집을 노란색으로 단장했습니다. 그리고 고갱은 10월에 그에게 왔습니다. 하지만 이 둘은 서로 맞지 않았습니다. 주식 중개인으로 일했던 고갱은 오만한 파리의 댄디였으며 아를의 집을 보고 초라해서 그는 실망했습니다. 고흐는 고갱이 자기와 친구들을 깔본다고 생각을 하고 급기야 고흐는 12월에 고 갱가 싸우다가 자신의 귀를 스스로 잘라 버리고 병원에 입원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고흐는 1898년 1월에 다시 이 노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방을 두 번 더 그립니다. 이렇게 해서 아를의 반 고흐의 방은 3개의 작품이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고흐의 불안한 내면 심리가 묻어납니다. 작가의 내면세계 감정과 감각을 담아내고자 하는 현대미술로 가는 징검다리가 되는 작품입니다.

고흐는 해바리가의 화가라고도 할만큼 해바라기를 많이 그렸습니다. 그가 그린 해바라기는 고갱이 노란 집으로 오기를 기다리면 그린 해바리가 입니다. 온통 노란색으로 집에 노란 해바라기 그림으로 장식을 한 것입니다. 고흐가 황색증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고흐의 배바라기는 이전까지의 사실적인 정물화와는 전혀 다릅니다. 내 마음의 해바라기입니다. 이전까지의 사실적인 정물화와는 전혀 다릅니다. 내 마음의 해바라기 강렬한 붓 터치와 형태적 질감이 돋보이는 고흐의 내면의 해바라기 고흐의 그림은 흉내내기 어렵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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